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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퇴근을 하고 ‘더 글로리 파트 2’를 보기 위해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딱 7시간 반, 한 번에 정주행. 중간에 안 자냐는 아내의 물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악마처럼 보였던 연진, 재준, 사라, 혜정, 명오, 연진 엄마, 신 차장, 무당, 동은 엄마, 현남의 남편까지 악한 이들이 서로 얽히며 한 명도 빠짐없이 응징을 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전개, 사이다 같이 쾌감을 주면서도 여운이 남는 마무리까지. 이 작품의 대본을 쓴 김은숙 작가는 천재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길래 저렇게 글을 잘 쓰는지 궁금해져 찾아봤다.
그녀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홀어머니 슬하의 삼 남매 중 장녀였다. 본인을 표현하기를 ‘현실은 별로인데 이상은 높아 불행한 아이’였다고 한다. 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의 작은 가구회사에서 경리로 7년을 보내다 동경하던 신경숙 작가를 따라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가난 때문에 7년 동안 일하며 모았던 돈으로 겨우 입학금을 내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꿈꾸었던 신춘문예에 2년간 지원했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현실을 돌아보니 30만 원 월세방에, 어떨 때는 새우깡으로 3일을 버티는 자신을 보며 그냥 고향으로 내려갈까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여러 종류의 글을 쓰며 준비하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이 드라마 작가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드라마 작가로 일하기 시작한다. ‘태양의 남쪽’이라는 작품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고 그 이후로는 우리가 익히 아는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선샤인 등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는 스타작가가 되었다.
세상에 드라마 작가는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 최고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녀는 누구보다 드라마를 사랑한다. 자신은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인데 어떤 작품에서건 좋은 점이 있고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좋은 드라마건 나쁜 드라마건, 미국 드라마건, 한국 드라마건, 명작이든, 막장이든 적어도 하나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단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대사를 쳤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드라마를 볼 때 굉장히 사소한 것까지 살피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지인들과 술자리에서도 드라마에 관련된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받아 적거나 녹음을 해서 자신의 드라마를 쓸 때 반영한다.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꼼꼼히 한다. 이번에 바둑을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가는 도구로 정한 이후 관련된 책과 글을 읽으며 바둑의 본질과 의미, 아름다움에 대해 이해하고 반영했다. 또한 드라마의 제목을 정할 때도 피해자들의 글을 많이 읽어보았는데,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진심 어린 사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해자들이 폭력을 당한 이후에 진짜 찾고 싶은 것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돈 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영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더 글로리’를 제목으로 정했다.
사실 그녀는 로맨틱 코미디의 장인이다. 하지만 까칠한 성격의 능력 넘치는 남자 주인공과 자존심 빼면 시체인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여주인공의 구도,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기대어 자기 복제식으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엔딩에 있어서도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허망한 마무리, 개연성 적은 용두사미식 해피 엔딩이라며 욕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그녀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늘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했고 비판이 되는 포인트도 줄어들었다. 이는 꾸준히 본인을 업그레이드해 온 증거라 볼 수 있다. 이번 작품을 본인 전공인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장르물로 시도한 것도 그녀의 도전이라 볼 수 있다.
글을 쓸 때 무조건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거나, 감정에 따라 일하지 않는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생각을 이끌어 나간다. 예를 들어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 사이에서 달달한 장면을 넣고 싶었는데 여주인공이 스턴트우먼이라 운동이 적합하겠다고 생각했다. 운동 중에서도 어떤 운동을 넣는 것이 적절할지 생각하면서, PT체조는 딱딱할 것 같고, 줄넘기를 시키면 혼자서만 하는 운동이고, 주인공들 사이에서 함께 하는 운동을 생각하다 상대방의 몸을 잡아주는 윗몸일으키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막 쓰는 것이 아니라, 역할과 개연성에 맞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풀어간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활용한다. 본인은 누구보다 유서, 편지를 잘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에서도 동은의 마음을 잘 설명하기 위해 ‘연진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전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중간에 현남이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 홈스테이 호스트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낸다며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도 나오는 데 정말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했다. 또한 ‘애기야 가자’, ‘그게 최선이에요?’,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 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등 명대사로 유명한 그녀는 티키타카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극의 재미도 극적으로 끌어올리며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비장하다가도 유쾌하고, 음울하다가도 웃음이 나게 하는 대사들.
그녀는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대한다. 연기를 잘하는 조연배우는 몇 번이라도 같이 일하고 본인과 일했던 분 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자신과 함께 일했던 보조작가들이 데뷔를 하게 될 때 보통은 자신의 브랜드를 망칠까 봐 누구의 보조작가였다고 이름을 파는 것을 꺼리는 데, 김은숙 작가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한다.
또한 함께 일하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번 연출을 맡은 안길호 PD에 대해서 본인이 쓴 글인데 너무 잘 만들어주어 눈물을 흘리고 보았다며 마치 마법사 같다고 인정하고, 낮이건 밤이건 새벽이건 언제든 작품에 대해서 문자를 보내면 바로 답변이 온다면서 언제 잠을 자는지 모르겠다며, 이런 연출가는 처음 보았고 연출가가 너무 열심히 해서 자신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며 공을 돌린다. 열심히 공들여 만든 이들을 위해 편집실에서 가편집된 영상을 볼 때도 좋은 장면을 볼 때는 소리를 지르며 너무 좋다고 보고, 정말 안 좋을 때는 감독님에게 몰래 조용히 이야기를 전한다.
피드백을 잘 듣고, 목적에 맞게 몇 번이고 다시 일한다. 동은과 여정이 함께 있는 장면의 대본을 감독에게 보냈더니 감독이 “우리가 만들려고 한 것이 로맨틱 코미디인가요? 장르물인가요?”라는 피드백을 듣고 자신이 그동안 로코물만 쓰다 보니까 거기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목적에 맞게 대본을 처음부터 다시 썼다. 정말로 좋은 결과물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의 피드백도 잘 듣고, 몇 번이고 다시 작업하는 것이 그녀의 힘이다. 어떤 일이든 몇 번씩 반복해서 작업하면 결과물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작품이 시작되면 하루에 18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서 글을 쓴다.
강원도의 가난한 문학소녀가 지금은 한 편에 억 소리 나는 금액을 받는 유명 스타 작가가 되었다. 이 자체가 살아있는 드라마 아닐까? 우리 모두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되기를 꿈꾼다. 따져보면 가난한 스턴트맨도, 파병 가는 군인도, 학교 폭력에 좌절한 피해자도 주인공이 된다. 누구든 자신의 드라마에는 본인이 주인공이다. 기왕 사는 인생이라면 조연처럼 살기보다는 주연이기를, 새드 앤딩이기보다는 해피 엔딩을 꿈꿔본다. 자신의 인생에도 환한 웃음과 함께 큰 소리로 손뼉 치며 ‘멋지다, 00아~’라고 외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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